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이 책은 커트 보니것이 실제로 참전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드레스덴 폭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전쟁도중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의 '제5도살장'이라는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폭격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드레스덴 폭격은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연합군이 독일 드레스덴을 폭격한 작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폭격으로 기록에 남지만 작전의 실효성은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한다.
이 책에는 공군 원수 손드비가 한 말로 폭격이 실행된 정황을 전하고 있다.
드레스덴 폭격이 큰 비극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이 정말로 군사적으로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전시에 가끔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 가운데 하나로, 여러 상황의 불행한 결합이 초래한 일이었다. 폭격을 승인한 사람들은 악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들이 전쟁의 잔혹한 현실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어, 1945년 봄에 이루어진 공중 폭격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은 커트 보니것처럼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인들에 의해 처음 시간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수시로 전쟁의 시간으로 되돌려놓는다. 빌리는 다음에 어느 시간으로 갈지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갑자기 시간여행을 하게 되고 그렇게 뒤죽박죽인 채로 거기에 맞춰 자신을 연기해야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빌리가 실제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 기억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고통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중에는 트랄파마도어 행성으로 납치되어 알몸으로 그곳 동물원에 전시되기도 하는데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시간 개념은 다음과 같다.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예를 들어 우리가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듯이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봐서 알고 있고, 그 가운데 관심이 있는 어느 순간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다.
뭐 그런 거지.
트랄파마도인에게 죽음이란 그냥 그 순간에 나쁜 상태에 처했을 뿐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사람을 두고 '뭐 그런 거지.' 하고 말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죽음에는 '뭐 그런 거지.'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사용된다. 트랄파마도인처럼 죽음에 집중하는 것보다 다른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자는 작가의 의도였을지, 아니면 드레스덴에서의 폭격으로 허무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런 대규모 폭격을 안일하게 결정하는 듯한 모습에 비판을 하는 것인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에드거 더비가 지하묘지에서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약탈죄로 총살당하는 장면은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 책은 반전소설로도 분류되는데 곳곳에서 그런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전쟁 때 아이에 불과했다고요 - 위층에 있는 저애들처럼!"
(중략)
"틀림없이 아이가 아닌 어른이었던 척할 거예요. 영화라면 프랭크 시나트라와 존 웨인, 아니면 다른 매력적이고 전쟁을 사랑하는 추잡한 늙은 남자들이 두 사람 연기를 하겠죠. 그럼 전쟁은 그냥 멋지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또 많이 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전쟁에 위층에 있는 애들 같은 어린아이들이 나가 싸우게 되겠죠."
하지만 빌리는 멋진 배우에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냥 겁쟁이에 어리바리한, 어쩌면 우리와 가장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나는 또 아들들에게 학살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지 말고, 우리에게 그런 기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경멸하라고 말해왔다.
소설의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처음에는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에 의해 파괴된 빌리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니 하나씩 이해가 되었다. 그는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일상생활은 수시로 전쟁의 상황이 이어진다. 잠시 휴식 중에도, 일을 하는 중간에도 갑자기 그는 포로가 되어 제5도살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오히려 트랄파마도어의 동물원이 그에게 유일한 피난처처럼 보인다. 이처럼 전쟁은 도시와 문명,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파괴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빌리에게 트랄파마도인들은 이런 조언을 한다.
세월이 흐른 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라고, 불행한 순간은 무시하라고 - 예쁜 것만 바라보고 있으라고, 그러면 영원한 시간이 그냥 흐르지 않고 그곳에서 멈출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미 파괴되어 버린 빌리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주는 것은 그나마 몇 안 되는 행복한 기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펭귄클래식) (0) | 2024.03.13 |
---|---|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열린책들) (0) | 2024.02.21 |
시대예보-핵개인의 시대(송길영, 교보문고) (1) | 2024.02.03 |
기후변화, 그게 좀 심각합니다.(빌 맥과이어 / 양철북출판사) (2) | 2024.01.30 |
분노의 포도(존 스타인벡, 민음사) (2) | 2024.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