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만약에 직장에서 상사가 어떤 지시를 했는데 저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적인 지시도 아니고 정당한 업무에 관한 지시였을 때 말이다.
그의 태도에 불안감, 분노, 조급함, 무례함 같은 것, 다시 말해 그에게 인간의 통상적인 면이 조금이라도 엿보였더라면, 나는 당장 그를 내 사무실 밖으로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정의 동요도 없이 말을 하면 오히려 지시하는 입장에서 더 무안해지고 그 지시를 거둘지도 모른다. 월 스트리트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 필경사로 취직한 바틀비의 이야기이다.
작품의 화자인 변호사는 젊은 시절부터 인생을 쉽게 살아 나가는 것이 최고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시끄러운 소송에 관한 일보다는 부자들의 채권, 저당 증서, 부동산 권리증 따위를 다루는 편안한 업무를 하고 있다. 그의 사무실에는 변호사와 세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데 각각 별명으로 터키, 니퍼스, 진저넛 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터키는 오전에는 온화하게 있다가 오후가 되면 얼굴이 빨갛게 불타오르면 흥분하는 특징이 있고, 반대로 니퍼스는 오전엔 소화불량으로 신경질적이 되고 오후에는 잠잠해진다. 다행히 두 사람이 항상 반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균형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저넛은 열두 살가량의 소년으로 잡다한 심부름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서류작성 업무가 많아져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게 되는데 그때 찾아온 사람이 바틀비이다. 바틀비에게는 뭔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얼굴이 창백하리만치 말끔했고, 동정이 갈 만큼 예의가 발랐으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외로워 보였다.
바틀비를 채용한 변호사는 그의 영향으로 터키나 니퍼스의 이상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한다. 처음에는 변호사의 생각이 맞아 들어가는 듯했다. 바틀비는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걸신들린 듯 서류를 베껴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그저 아무 말없이, 무기력하게, 기계적으로 일할 뿐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바틀비가 베낀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서 그를 찾은 변호사에게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라고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몇 차례 그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을 뿐이다. 아연실색한 변호사는 화도 내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일을 맡긴다. 며칠 뒤 다시 그에게 서류 검토 업무를 지시한 변호사는 다시 같은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틀비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
다른 녀석이었더라면 나는 분노에 휩싸였을 테고 그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든 내 면전에서 그를 굴욕스럽게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바틀비에게는 이상하리만큼 내 분노를 가라앉힐 뿐 아니라 놀라운 방법으로 내 마음을 움직여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변호사는 계속해서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바틀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바틀비의 외로워 보이는 모습과 맘에 걸리는 것 때문에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아마도 소란을 싫어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원하는 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 같다.
어느 일요일 아침 사무실에 잠깐 들른 변호사는 사무실에서 유령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바틀비를 보고 깜짝 놀란다. 잠시 후에 다시 오라는 바틀비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사무실에서 나와 골목을 배회하다 다시 돌아간 변호사는 그곳에서 바틀비가 기거하고 있는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바틀비에 대한 분노보다 친구도 없이 쓸쓸하게 혼자 지냈을 바틀비의 고독감이 어찌했을지 생각한다.
다음날 바틀비를 해고하기로 마음먹은 변호사는 바틀비를 불러 이것저것 질문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이다. 그다음부터 바틀비는 글을 베껴 쓰는 업무도 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그의 시력이 손상됐을 거라 생각한 변호사는 며칠 동안 시간을 주지만 바틀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붙박이 세간처럼 남아있다. 바틀비를 달래 보기도 하고 돈을 쥐어주면서 그만 떠나라고 부탁하지만 여전히 거절하며 끝까지 남아있다. 점점 사무실에 걸림돌이 돼 가는 바틀비를 어떻게든 내 보낼 수 없는 변호사는 결국 사무실을 옮기기로 작정한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에게서 그렇게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했건만 억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무실을 이사까지 하면서 억지로 바틀비를 떼어놓지만 계속 꺼림칙한 기분이 남아있다. 일주일 후 예전 사무실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바틀비를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부탁하러 찾아온다. 바틀비는 여전히 그 사무실에 계속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틀비를 설득하러 변호사가 찾아가 이런저런 제안을 해 보지만 그는 여전히 모두 거절한다. 결국 바틀비는 교도소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지내다 죽음을 맞는다.
나중에 바틀비에 대한 풍문을 들은 변호사는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바틀비는 워싱턴 우체국의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부서에서 근무를 했다고 한다. 배달 불능 우편물이란 수취인이 죽거나 하는 사정 때문에 배달되지 못한 우편물 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근무한 바틀비가 어땠을지 생각해 본다.
이 죽은 편지들을 쉴 새 없이 분류해서 불태워 버리는 직업만큼 그 절망을 더 깊게 만드는 직업이 또 있겠는가?
사실 바틀비의 행동은 바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아무리 본인이 깊은 절망과 고독에 빠져있더라도 결국 민폐를 끼치는 행동이 아닌가? 오히려 끝까지 그를 이해하려고 하고 도움을 주려고 한 변호사가 더 대단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아마도 바틀비를 통해 깊은 절망과 고독이 인간을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세상이 발달할수록 양극화는 뚜렷해지고 무기력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난다. 이 소설이 발표된 지도 벌써 150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계속 읽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 무기력함이 사회에 만연해 있어서 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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