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인류사 전반에 등장하는 다양한 식물들을 소개하며 각각의 식물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는 먹을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 역시 아주 오랫동안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렵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식물을 재배하는 법을 알게 되고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며 다양한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이 해결되면 기호품을 찾기 마련이다. 이 책에는 감자, 밀, 벼와 같은 주요 식재료부터 후추나 고추와 같은 향신료들과 차와 같은 기호식품,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거품경제를 일으킨 튤립 등 우리가 전에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식물들의 이야기와 그에 얽힌 인간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감자가 지금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만들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남미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인 감자가 16세기 유럽에 전해진 이후로 지배계급은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감자보급에 힘쓴다. 처음에는 감자가 악마의 식물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지만 점차 주요 식재료로 퍼지게 되고 또한 가축의 먹이로도 사용되면서 육식 증가에도 기여를 하게 된다. 아일랜드에서는 거의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1840년대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이 창궐하면서 대기근이 닥친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가 800만이었다고 하는데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고 400만 명의 사람들이 고향인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당시 미국은 본격적인 공업화 단계에 들어가는 시점이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던 시점이었는데 마침 대규모의 이민으로 그들을 노동자로 흡수해 최고의 공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감자가 초강대국 미국을 만들었다는 말은 어찌 보면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던 그 배경에 감자가 있었음은 틀림없다.
모든 것은 '후추 때문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후추를 향한 인간의 '검은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의 도입부에 있는 문장이다. 무슨 내용일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후추는 향신료로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고 고기를 어느 정도 양호한 상태로 보관할 수 있게 해 준다. 겨울이 닥쳐 식량이 부족해졌을 때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마법의 가루와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추의 원산지는 남인도이고 아열대 식물이라 아랍지역과 유럽에서는 재배할 수 없었다. 당연히 후추의 가격이 높아지고 금과 맞먹는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이니 후추를 구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이 혈안이 됐고 후추를 육로가 아닌 해로로 들여오기 위해 다양한 항로가 개척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처음에 가장 앞서 나갔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오인하고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대항해 시대를 열고 전 세계가 교류하는 지금의 역사를 만든 배경에는 후추가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 노예무역 등 어두운 역사를 만든 이면에도 역시 후추를 향한 검은 욕망이 있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우리 주위의 식물들이 생존을 위해
치열한 진화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은 생물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어쩌면 식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오래 살아남고 자손을 좀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해
어떻게 진화해 갈지 궁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이나 벼와 같은 볏과 식물은 인류가 농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식물들이다. 하지만 이런 식물들은 탈립성이라고 하는 자신의 몸에서 씨앗이 떨어지도록 해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성질이 있다. 이런 탈립성을 가진 식물들은 씨앗을 먹으려고 해도 땅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양을 얻기 힘들어 충분한 식량 공급원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연히 비탈립성의 성질을 가진 돌연변이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이용해 농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탈립성을 가진 식물은 자연계에 씨앗을 퍼뜨리지 못해 자손을 남길 수 없다. 하지만 그 돌연변이가 인간에게는 유용하게 작용해 인간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인간의 손에 의해 계속 번식해 자손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옥수수 역시 씨앗이 껍질로 둘둘 말려있어 땅에 퍼뜨릴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도움 없이는 자랄 수 없는 식물이라 마치 처음부터 누군가가 작물로 먹으려고 만들어낸 느낌을 준다고 한다. 더군다나 옥수수는 조상 격인 식물이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우주에서 온 식물'이라는 전설도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토마토, 양파, 고추, 차 목화 등 인류의 역사에 중요한 순간을 제공해 준 여러 식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먹거나 소비하는 식물들에는 그 나름대로의 역사와 인간의 욕망, 그리고 치열한 생존 전략이 숨어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 식량을 얻기 위해 이 식물들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식물들에게 선택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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